놀자/자유의 바람

APEC 이전에 베트남은 더 위대했다.

유나톡톡 2006. 11. 18. 23:16

베트남에서 희망을 가져오시기 바랍니다.
APEC 이전에 베트남은 더 위대했다.  / 초모룽마

노무현 대통령이 베트남에 갔다.

베트남. 베트남 하면 무엇이 생각나는가? 한국 사람한테 ‘베트남하면 생각하는 것은?’ 하고 물어보면 십중팔구는 '베트콩', 보트피플, '고엽제', 길거리에 나붙은 '베트남 처녀 운운’ 등등을 떠올릴 것이다. 하나같이 ‘부정적’인 것들이다.

우리나라, 특히 50대 이상에게는 베트남은 ‘베트콩에 의해 적화된 가난한 나라이자, 자신의 딸들을 외국에 팔 수 밖에(?) 없는 나라’이다. 적어도 조중동 30년 독자에다 혹독한 유신시절을 겪었던 사람들에게는 베트남은 그런 나라이다.

그런 베트남이 APEC 정상회의를 개최한단다. 아시아태평양 21개국의 정상들이 친히 이 ‘빌어먹을 땅’을 방문하는 것이다. ‘베트남’이 아닌 ‘월남’ 세대들에게는 놀라 자빠질 일이다. ‘그 먹을 것 없는 나라에 뭐 하러 가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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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은 그런 나라가 아니다. 독자 힘으로 구 식민제국 프랑스, 초강대국 미국을 연달아 거꾸러뜨린 그런 나라이다. 개별적으로 봤을 땐 작고 힘없는 사람들이지만, 모이고 소통하고 연대하고 단결할 땐 미국, 중국, 프랑스, 일본 그 어떤 나라도 감히 얕잡아 볼 수 없는 그런 나라이다.

경제적으로도 그렇다. 누가 지금 베트남을 무시하겠는가? 베트남은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지난 5년간 연평균 성장률은 7%다. 30년 전 베트남의 ‘적화’에 두려움을 느낀 보트피플은 다시 베트남으로 돌아오고 있다. 역시나 경제분야에서도 가장 큰 자원은 '사람들'이다.

물론 베트남에도 강대국에 빌붙어 자신의 기득권을 향유하고자 하는 그런 인간들이 있었다. 과거 베트남의 프랑스 식민지화, 미국 괴뢰국화는 그렇게 이루어졌다.

그런 베트남을 구해낸 것은 그 잘난 프랑스 유학파 지식인이 아니었다. 수백, 수천 ㎞ 터널들을 뚫고 땅 밑으로 숨어들었던 민중들이었다. 물론 호치민은 지식인이었다. 영웅 호치민이 베트남을 필요로 했는가? 아니면 베트남의 시대상황이 호치민을 필요로 했는가? 후자이다.

프랑스가 들어오기 전 베트남은 소박한 농촌 공동체의 사회였다. 그 사회구조를 일거에 깨트린 것은 자본가와 대지주들의 고무농장과 플랜테이션이었다. 수천 년을 이어온 민족의 전통이 프랑스, 그리고 뒤이어 미국에 의해 깨진 것이다.

민중은 이에 저항할 충분한 의사가 있었다. 그들은 다만 이 저항을 상징화할 인물이 필요했다. 호치민은 그런 의미에서 아주 적합한 인물이었다. (해방 후 우리에게도 호치민 같은 인물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누군가에 의해 차례로 제거되었다)

1918년 베르세이유 궁전에서 ‘민족자결주의’를 외쳤던 윌슨 대통령을 면담코자 안절부절못했던 29살의 연약한 식민지 청년을 시대는 무서운 호랑이, 혁명가로 변화시켰다. (베르사이유의 호치민과 헤이그 평화회의의 이준 열사가 오버랩 된다)

청년이 보기에 이권을 스스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 분명한 식민제국과의 한판 전쟁은 불가피했다. 민중은 준비되어 있었다. 호치민도 각오가 되어 있었다. 호치민은 사실 끝까지 평화를 원했다. 그런 그를 전쟁으로 몰고 간 것은 바로 구시대의 질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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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을 모르고서는 베트남은 절대 이해될 수 없다. 베트남전쟁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1945년 일본의 패망과 함께 호치민의 베트남민주공화국(베트민)이 선포되었다. 근데 전쟁 때 일본에 쫓겨 줄행랑을 쳤던 프랑스가 뻔뻔스럽게도 베트남에 다시 얼굴을 들이민 것이다. ‘베트남은 영원히 내꺼!’ 이것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포츠담선언이 문제였다. 미, 영, 소 등 2차대전 승전국은 베트남을 북은 중국이, 남쪽은 영국이 점령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여력이 없던 양국은 프랑스의 기득권을 인정해 버리고 만다. (이 결정은 한반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다만 프랑스는 승전국, 일본은 패전국이었다는 것이 다르다)

식민주의자들은 시대가 바뀌었다는 것을 몰랐다. 식민지들이 또다시 고분고분 하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2차대전은 그 전시대의 모순과 질곡을 한꺼번에 드러냈고 깨트려버렸다. 베트남 민중들은 예전과 달리 각성했다. ‘누구 맘대로!’

호치민은 분노한다. “도대체가 베트남 국민의 의사는 무시한 채, 저들의 결정만으로 베트남을 이분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단 말인가!” (민족의 운명이 다른 나라에 의해 결정되었다는 것은 우리나라와 똑같다. 그러나 호치민의 저 분노를 똑같이 되뇌었던 사람들은 어찌되었던가!)

아직 평화를 원했던 호치민과 프랑스는 협약을 체결한다. 베트남이 프랑스연방으로 남고 군대 주둔을 허용하는 조건으로 호치민의 베트남 통치를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는 남쪽에 괴뢰정부를 수립함으로써 그 협약을 깨고 만다. 결전은 불가피했다. (군대의 주둔허용! 이것은 명백한 기만이다)

프랑스군은 베트민의 저항을 분쇄하기 위해 (미국 군사고문단과 함께) 1953년 11월 낙하산 부대를 투입, 디엔비에푸에 13km에 달하는 요새를 구축하였다. 승리를 자신했으나, 프랑스군은 괴멸했다. 1만 명이 항복하고, 5천명이 전사했다.

이로써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100년 지배는 강퇴를 당했다. 이 전투는 동양이 서양과의 결전에서 오랜만에 승리한 케이스이며, 서양 제국주의 종말을 극적으로 상징한다. 새로운 시대가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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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엔비에푸의 결과 1954.5월 미국·영국·프랑스·소련·중국·남베트남·북베트남 등 9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제네바 평화회의가 진행되었다, 그 결과 베트남휴전협정이 체결되고, 선언이 채택되었다.

베트남휴전협정은 북위 17°선을 따라서 잠정 군사경계선을 설정하였고, 선언에서는 1956.7월 국제관리하에 남북통일선거 실시를 명시하였으며, 베트남을 포함한 인도차이나 3국의 주권·독립·통일·영토보전의 존중 등이 약정되었다.

물론, 미국과 남베트남 정권은 최종선언에 서명하지 않았다. 그리고 미국은 철수한 프랑스를 대신하여 남베트남에 고딘디엠을 수반으로 하는 (남)베트남공화국을 만들었다. 이것이 역사적인 2차 베트남 전쟁의 기원이다. 베트남 국민들로서는 상대가 프랑스에서 미국으로 바뀐 것 밖에 없다. 미국의 장난질이 시작된 것이다. (한반도의 상황과 매우 유사하다)

미국이 제네바 휴전을 무시하고 고딘디엠 정권을 수립한 것은, 총선에서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민이 승리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리영희 선생은 1970년대 베트남전쟁이 종결되기도 전에, 반공의 광풍이 불던 유신시절에 이것을 정확히 분석해냈다. 시대의 지식인은 이래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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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 8월 북베트남의 어뢰정이 미군 구축함을 공격한다. 통킹만 사건이다. 베트남 '공산화'는 동남아시아 전체의 공산화를 가져온다고 판단한 미국은 이 사건을 핑계로 베트남 전쟁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게 된다. 이어 1965년에는 북베트남에 대한 폭격, 이른바 북폭(北爆) 개시. 1968년까지 미지상군의 투입도 54만 명으로 확대되었다. 전쟁은 전면전으로 확대되었다.

여기서 두 가지 문제점이 제시된다. 첫째는 통킹만 사건은 조작이다. 뉴욕타임스가 인용한 국가안보국(NSA)의 보고서는 “그날 밤(북베트남으로부터) 아무 공격도 없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둘째는 북베트남이 '베트콩'(남베트남에서 게릴라전을 전개하던 베트남민족해방전선)을 통제할 수 있느냐의 여부다. 미국은 북베트남이 해방전선을 지원한다는 이유로 북베트남의 주요도시를 폭격한다. 타국에 대한 침략행위다. 최소한 미국은 북베트남에 압력을 가해 해방전선을 무력화시키고 싶어 했다.

그러나 비록 '호치민 루트'로 알려진 지원라인이 알려져 있었지만, 그 지원이 공식적으로 확인되지 않은 상황에서 북폭의 감행은 국제법 위반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해방전선은 호치민의 명령계통에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해방전선은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조직이었다.

1973년 휴전당사자로, 해방전선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이 사후적으로 이를 증명한다. 결국 통킹만 사건도, 북폭도 미국의 또 하나의 장난이었다는 것이 드러난 것이다. (이러한 장난은 지금도 계속된다. 이라크, 이란, 북한, 아프카니스탄 등등)

구찌터널과 구정대공세

왜 베트남 민초들은 괴뢰정권과 미군에 대항에 싸우게 되었는가? 이념 때문이 아니다. 해방전선이 내건 구호도 이념하고는 상관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베트남민족해방전선의 주요 강령은 ① 고딘디엔 정권의 타도와 민족민주합정부의 수립, ② 진보적 민주주의의 실현, ③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경제건설, ④ 소작료 경감과 점진적인 토지개혁, ⑤ 평화적인 외교중립정책, 세계평화 옹호 등이다.

위에 보듯이, 베트남 전쟁은 미국과 박정희 유신정권이 세뇌시킨 바, ‘공산주의 무장 폭동’이 아니다. 그것은 완전한 독립달성, 독재정권 타도, 남북베트남의 완전통일을 목표로 하는 민족해방운동이다. (박정희가 유신의 핑계 중 하나로 ‘월남전’을 든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하게 보인다)

여기서 잠시 해방전선이 지배하는 마을의 분위기를, 어느 일본기자 쓴 “해방전선의 우편배달부”라는 책에서 살펴보자.

“구정(舊正)때의 해방촌 방문을 계기로, 2월부터 3월에 걸쳐서 나는 차례로 메콩 삼각주에 있는 해방촌들을 찾았다. 불교도인 그 (안내) 여대생은..너무나도 간단하게 나를 해방촌으로 데려다주었다..마을 사람들은 나를 진귀한 그녀의 손님으로서 마음으로부터 환영했다...(중략)..나의 낡은 지식은 그 뿌리째 흔들렸고..이제야 나는 두 눈으로 베트남을 볼 수 있게 되었다”

△ 해방전선 전사들


대미 항전의 상징은 구찌터널이다. 지금은 베트남 관광의 필수코스가 되었고 관광객들의 '체험'을 위해 터널을 넓혀 놓았으나, 원래는 몸집 작은 베트남 사람들조차 드나들기 어려운 매우 좁고 긴 땅속 참호요, 생활공간이었다.

미국은 낮과 땅위를 지배하고, 해방전선은 밤과 땅 밑을 지배한다. 근데 웬일인지 무기라고는 구형 소총 밖에 없는 이 땅속 게릴라에 미군은 속수무책이다. 땅속의 연대와 네트워크, 그리고 인내는 미군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다.

땅속에 숨어있던 게릴라들은 마침내 1968년 설날, 사이공 등 남부 대도시에 대한 총공세를 감행한다. 구정 대공세는 미국의 베트남전 반대 여론을 결정적으로 확산시킨 최대 국면 전환기로 간주되고 있다. 군사적인 측면에선 해방전선의 구정 대공세는 실패했으나 정치, 심리적으론 승리를 거뒀다는 게 역사가들의 평가다.

미군들이 때려잡았다던 게릴라들이 백주에 미군 정규군과 대도시에 대해 대역습을 감행한 것이다. 미국 사람들은 속았다고 느꼈다. 그들이 보기에 베트남은 끝모를 수렁이었다.

전쟁은 소모전이 되고 있었고 미군들은 총을 거꾸로 드는 일이 다반사가 되었다. 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은 더욱 잔인해졌다. (영화 ‘플래툰’의 학살장면은 약과다). 다들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런데 인내에 있어서는 단연코 해방전선이 앞섰다. 미국은 패배를 감수하고 철수를 준비한다(베트남전의 베트남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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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 10월, 프랑스 파리의 한 호텔. 미국과 북베트남, 남베트남, 그리고 베트남 남부 임시혁명정부(해방전선) 4자 사이에 휴전협정식이 열렸다. 이 '파리협정' 체결로 베트남전쟁이 공식적으로 휴전에 들어갔다. 미군과 북베트남은 포로를 교환하고 미군의 철수가 시작됐다.(여기서 중요한 것은 해방전선이 협정 당사자로 조인한 사실이다. 끈질긴 투쟁의 결실이 맺어진 것이다)

미군이 철수한 남베트남은 허수아비였다. 그러나 남베트남 정권은 ‘파리협정’을 먼저 어긴다. 이윽고 통일전쟁이 시작된다. 북베트남과 해방전선은 파죽지세로 1975. 4.30일 사이공을 점령한다. 21년만의 통일이다.

사이공 함락 전날, 미국대사관에는 대사관 직원과 가족들, 그리고 남베트남 고위층들을 탈출시키는 작전이 전개되었다. ‘미스 사이공’이라는 뮤지컬에도 나오는 비극적 헬기 탈출 장면이다. (그들은 베트남이 ‘공산화’되면 잔인한 보복을 받을 것으로 우려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없었다)

마지막 탈출 장면은 아수라장이었다. 헬기에 필사적으로 매달리던 사람들은 강제로 떼어 내어졌다. 헬기를 타지 못한 사람들은 보트피플이 되었다. 같은 시각 베트남해방군은 대통령궁에 무혈 입성한다. 전쟁이 끝난 것이다.

다음해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이 수립된다. 독립이 쟁취되었고, 주권도 회복되었다. 베트남의 정통성이 처음으로 확보된 것이다. (베트민을 수립한지 정확히 30년만이었지만 호치민은 이 감격의 순간을 보지 못하고 1969년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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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베트남은 시련의 역사를 겪게 된다. 인도차이나 인접국가와의 관계, 중국과의 갈등, 그리고 미국의 봉쇄! 베트남은 철저히 고립되었다. 이 과정을 견디지 못한 사람들은 다시 보트피플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성급했다. 자신들의 저력을 미처 보지 못한 것이다.

베트남은 1986년 도이모이 정책을 도입한지 불과 20년 만에 APEC 정상회담을 개최할 능력을 가진, 아시아에서 무시 못 할 국가로 성장한 것이다. 그러나 APEC 이전에 베트남은 더 위대했다.

대국들을 상대로 자신의 힘으로 주권,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확보한 것이다. 이런 민족을 건드릴 수 있는 국가는 없다. 예전 중국의 황제들은 호시탐탐 베트남을 노렸으나, 모두 강력한 저항에 놀라 발을 뺐다.

그런 베트남이 근 100년간 국권을 상실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임시적이었고 국민들의 동의를 받지 않은 것이었다. 그것은 베트남에서는 저항 받을 운명이었다. 식민주의자들은 베트남에서 쫓겨났다.

베트남은 이제 동남아의 강국으로 떠오를 것이 분명하다. 아니 동남아를 넘어 아시아의 맹주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미국과의 끈질긴 승부로 그 잠재능력을 드러냈다.

베트남 사람들은 자존심이 세다. 떳떳하다. 20년간의 전쟁으로 베트남이 얻은 것은 바로 이것이다. 발전과 성장을 위한 기초, 자립과 주권 확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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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어떤가? 수구들은 미국의 '우산'아래 편하게 기득권을 유지하려 한다. 미국이 전시 작전통제권을 주겠다는데, 이것마저 ‘나중에’라며 손사래를 치고 있다.

국회의원이라는 자들은 미국으로 떼로 몰려가 한국의 대통령을 욕하면서 '제발 버리지 마세요!'라고 구걸하고 있다. 저 베트남이 보이지 않는가? 그들은 굴종 대신 싸움을 택했다. 베트남 사람들보다 우리가 못한 것이 무엇인가? 왜 베트남처럼 완전 주권을 회복하지 못하는가?

지금 베트남은 한국에 처녀들을 ‘수출(?)’하고 있다지만, 과연 누구의 역사가 떳떳할 것인가? 베트남은 20년에 걸쳐 과거의 잔재를 깨끗이 청산했다.

우리는 무엇인가? 친일의 역사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고 여기에 숭미까지 덧붙여진다. 한반도의 질곡과 모순은 전혀 타파되지 않고 있다. 미래를 향하여 나아갈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이렇게 계속된다면 베트남은 한국을 추월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

현재와 미래는 과거와의 단절이 아니다. 미래는 과거 없이는 절대로 올 수 없다. 그래서 우리가 역사를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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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드 바꿔)

노무현 대통령의 성공적인 베트남 방문을 기원합니다. 베트남은 이제 버림받은 땅이 아니라 희망의 땅입니다. 그곳에서 희망을 더 키워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그 희망으로 우리나라의 미래를 만들어 주시길 바랍니다.

* 역사토론방에 올릴까 하다가 국제방에 올립니다.



ⓒ 초모룽마